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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늙으면...

취미방/좋은 글

by 배남골 2008. 5. 4.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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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학교 채용학 교감님 글

 

 



 나 늙으면

당신과 이렇게 살아보고 싶어

 


가능하다면 꽃밭이 있고

가까운 거리에 숲이 있으면 좋겠어

개울 물 소리 졸졸거리면 더 좋을 거야



잠 없는 나 당신 간지럽혀 깨워

아직 안개 걷히지 않은 아침 길

풀섶에 달린 이슬 담을 병 들고 산책해야지




삐걱거리는 허리 주욱 펴 보이며

내가 당신 “하나 두울~” 체조시킬 거야



햇살이 조금 퍼지기 시작하겠지

우리의 가는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반짝일 때

나는 당신의 이마에 오래 입맞춤하고 싶어

사람들이 봐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


 

 



아주 부드러운 죽으로

우리의 아침 식사를 준비할 거야



이를테면 쇠고기 꼭꼭 다져넣고

파릇한 야채 띄워 야채죽으로 하지

깔깔한 입 안이 솜사탕 문 듯 할 거야



이 때 나직히 모짜르트를 울려 놓아야지

아주 연한 헤이즐럿을 내리고

꽃무늬 박힌 찻잔 두 개에 가득 담아

이제 잉크 냄새 나는 신문을 볼 거야



코에 걸린

안경 너머 당신의 눈빛을 읽겠지

눈을 감고 다가가야지

서툴지 않게 당신 코와 맞닿을 수 있어

강아지처럼 부벼 볼 거야



해가 높이 오르고

창 깊숙이 들던 햇빛 물러 설 즈음

당신의 무릎을 베고

오래오래 낮잠도 자야지

아이처럼 자장가도 부탁해 볼까



어쩌면 그 때는

창 밖의 많은 것들

세상의 분주한 것들

우리를 닮아 아주 조용하고

아주 평화로울 거야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당신의 굽은 등에 기대 울고 싶어



장작불 같던 가슴

그 불씨

사그러들게 하느라

참 힘들었노라



이별이

무서워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노라



사랑하기 너무 벅찬 그 때

나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말할 거야 

 

 

 

 겨울엔

당신의 마른 가슴 덥힐 스웨터를 뜰 거야

백화점에 가서

잿빛 모자 두 개 사서 하나씩 쓰고

강변 찻집으로 나가 볼 거야

눈이 내릴까... 

 


 

  

봄엔

당신 연베이지빛 점퍼 입고

나 목에 겨자빛 실크 스카프 메고

이른 아침 조조 영화를 보러갈까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같은... 


 

 

가을엔

희끗한 머리 곱게 빗고

헤이즐럿 보온병에 담아 들고

낙엽 밟으러 가야지 

 
저 벤치에 앉아

사진 한 장 찍을까

곱게 판넬하여 창가에 걸어두어야지


그리고

그리고 서점엘 가는 거야

책을 한아름 사서 들고

서재로 가는 거야

난 푹빠져 잠이 들겠지.



나 늙으면 그렇게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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