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만의 파이팅5남매 강화여행
5남매 내외 전원 참석
강화역사관
입장( 셋째는 조금 늦게 출발 4가족이 역사관으로 입장
입구에는 영산홍이 만개후 꽃잎이 떨어지고있다
막내는 그저 바쁘다 바뻐
잠시 휴식중인 왕초님
사색에 잠긴 왕초누님
고목의 탱자나무
광성보
조선 광해군 10년(1618년)에 고려시대의 외성을 보수하고, 1656년 광성보를 설치했는데, 이 보의 돈대는 1679년에 축조된 것이며 오두, 화도, 광성의 돈대와 오두정 포대가 이 보에 소속되었다.
1745년 완전한 석성으로 개축되어 당시 성문도 설치되었다.
광성보는 신미양요 당시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로서, 1871년 4월 24일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였을 때, 상륙부대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용사가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는데,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과 맨주먹으로 싸워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고 장렬히 순국하였다고 한다.
해설사 해설의뢰
해설경청
막내의 행진
등꽃
넷째 도착
이런 바닷물 흐름을 보면 옛 당진화력발전소 등대설치시 사진촬영 하다가 불어난 물에 휩쓸릴뻔한 기억에 몸서리가 쳐진다
초지진
사적 제 225호이다. 조선 효종 7년(1656)에 안산에 있던 초지량영을 강화로 옮겨 진으로 승격시켰다.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지은 요새이다.
신미양요(1871) 때 미국 해병 450명이 20척의 작은 배로 상륙을 감행하여 초지진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화력의 열세로 결국 점령당했고, 군기고와 화약 창고 등 군사 시설이 모두 파괴되었다.
1875년에는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면서 일시적으로 복구되었던 초지진 포대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돈대와 터의 기초만 남아 폐허가 되었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다.
현재 타원형의 돈대에는 포좌 3개, 총좌 100여개, 실제 조선시대 말기에 사용하던 대포가 1문 전시되어 있다.
오랫만에 단체사진
전등사
윤장대
특별초청한 해설사(저 대웅보전 처마밑의 여인은....)
여기도 형님의 지팡이가 처마를 가라키며 해설을 하신다
팬션 도착
IXUS
얼큰한 선지해장국으로 점심
밥도 먹을수 없도록 장어로 포식
내 모자를 왕초께 선물(잘 어울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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